(여수)빛나는 바다와 다도해를 품은 사람들의 영광과 어두운 역사

 

- 일시: 2023-6-17~18
- 날씨: 대체로 맑으며 더운 날
- 몇명: 홀로

 

여수(麗水)의 지명을 보면 한려수도(閑麗水道)가 떠오르는데 "한산도와 여수 사이의 물길"을 의미합니다. 중국에도 동명의 여수 지명이 있는데 금이 많이 났었나봅니다.그래서  천자문의 금생여수(金生麗水)라고 해서 금(金)은 여수에서 난다는 사자성어도 떠오릅니다. 중국 여수에서는 사금(沙金)을 생산하지만 전남 여수에서 사금생산을 하여 유명하지는 않지만 여수에서 돈(金) 자랑 말라는 이야기도 있는 것을 보면 뭔가 일맥상통하는 의미는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여수의 섬은 365개입니다.

 

개인적으로 여수를 몇번 다녀갔는데 영취산 진달래 산행으로 2번 다녀왔고,금오산 등반 후 향일암도 한번 갔었고 사진출사로 무술목에 갔었던 기억이 전부인 것 같습니다.그 외 방송매체를 통하여 "여수 밤바다"라는 노래가 떠오르고 여수엑스포 장면이 떠오릅니다.그러고 보니 부산에서 그리 먼 곳도 아니지만 방문횟수는 별로 입니다.

 

(2007년 8월 무술목)

이번 탐방은 이순신장군과 관련된 유적지와 도올의 "우린 너무 몰랐다" 책에서 언급된  여순사건의 다크투어를 섞어 동선을 계획했습니다. 다크투어는 어두운 역사의 흔적에서 오늘의 교훈을 얻기 위함입니다.

 

▷ 답사일정(風輪) :450km  

 

흥국사 -여수선소유적지 -전남 여수시 신월동 805 (육군 제14연대 주둔지) -진남관 -여수중앙초등학교 -형제묘-방답진성 굴강(전남여수시 돌산읍 군내리 987-15)

2023-6-17

 

전남 여수이지만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는 거리가 가깝다는 느낌이었습니다.묘도를 지나며 웅장한 이순신대교를 건너는데 시속 60km가 제한속도라서 천천히 올랐습니다.이순신대교 위에서 보니 여수산단의 불빛은 흡사 다이아몬드를 뿌려 놓은 것 처럼 불야성을 이루며 낮에 보았던 인상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습니다.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어디 마땅하게 정차할 만한 곳이 보이지 않아서 그대로 지나쳤습니다.

 

(1박)

 

2023-6-18

 

▷흥국사 

 

영취산 흥국사는 2004년 여수 산단도로 호남정유 맞은편 예비군훈련장으로 올라 진례산 정상을 밟고 봉우재,흥국사 방향으로 하산하면서 본 기억이 있습니다만 20여년만에 다시 오다보니 또 새롭습니다. 

 

나라가 흥하라는 의미의 흥국사 지명에서 보듯이 호국불교와 관련이 깊은 절입니다.

'나라가 흥하면 흥국사가 흥하고(國興則寺興국흥즉사흥)

흥국사가 흥하면 나라가 흥한다(寺興則國興사흥즉국흥)'

 

일주문 우측에 넓은 주차장이 있고 좌측에는 부도밭이 있습니다.

 

흥국사 중수사적비는 이진휴가 썼으며 인조2년 계특대사가 중창했다는 내용으로  뒷면에는 임진왜란을 겪으며 고난을 극복하며 사찰을 중건한 승려들을 높이 평가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중수사적비 아래쪽 용머리에 육각비늘을 보면 거북선 같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의승수군유물전시관의 공북루 편액을 보고 싶었지만 너무 이른 시각에 와서 문이 잠겨 있어서 보질 못했습니다.의승(義僧)이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왜구를 물리치기 위해 봉기한 승병(僧兵)에서 유래했는데 임진왜란 이후 국가에 의해 상설화하여 의승군(義僧軍)으로 불리었고 그 중 전라좌수영 산하 소속이 의승수군(義僧水軍)입니다.스님으로 구성된 해군에 해당합니다. 육군의 사명대사는 유명하지만 의승수군의 자운스님과 옥형스님 두승장은 저도 잘 몰랐습니다.스님은 딸린 식솔이 없어서 그나마 전쟁에 참전하는 마음이 다른 일반 백성들보다는 상대적으로 가벼웠을수도 있었겠지만 국가 위기시에 큰 힘이 되기위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순신이 1593년 3월 10일 조정에 보낸 장계의 일부가 <충무공 전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 난리 때에 자기 몸 편안히 할 것은 생각도 하지 않고, 정의와 기개를 발휘하여 군병을 모집하여 각각 300여 명씩을 거느리고 나라의 수치를 씻으려 하니 이들은 참으로 가상합니다. 2년째 해상에 진을 치고서 자기 스스로 군량을 준비하여 이곳저곳 나누어 공급하며 간신히 양식을 이어대는 그 고생스러운 정황은 관군보다 갑절이나 더한데, 아직도 수고로움을 거리끼지 아니하고 더욱 더 부지런할 따름입니다. 일찍이 적을 토벌할 적에도 현저한 공이 많았으며, 나라를 위한 분개심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으니 참으로 가상한 일입니다. (중략) 조정에서 특별히 표창하여 뒷사람을 격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기록을 보면 열악한 상황에서도 열심히 활동 한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적을 토벌할 적에도 현저한 공이 많았으며, 나라를 위한 분개심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으니" 부분에서 의승수군의 면모를 알 수 있습니다.

 

흥국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의승수군의 주둔지이자 훈련소였고 의승수군유물전시관에는 왜란 당시 전라좌수영이었던 이순신 장군의 친필로 전해지는 편액 ‘공북루’ 외 800여점의 유물이 보존되어 있습니다.무엇보다 노사나불괘불탱을 보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흥국사의 대웅전은 그 자체가 비보사찰 성격으로 반야용선을 의미합니다. 올라가는 계단에 용의 머리가 겹겹히 보입니다. 그리고 사찰 내 도량에는 탑이 안보입니다.탑을 세우면 반야용선이 내려앉는다고 해서 지형상 탑이 없다고 합니다.

대웅전 후불탱은 견본착색(絹本着色)으로 1693년(숙종 19)에 제작되었고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6보살·사천왕상·6대제자·6분신불(六分身佛)과 기타 성문(聲聞)이 배치된 그림으로 1974년 7월 9일 보물 제578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대웅전 좌측 벽면에 백의관음보살도가 보입니다.아래 선재동자가 손을 뻗어 합장하며 법을 구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18세기 최고의 화승으로 꼽히는 의겸 스님과 함께 그림에 소질이 있는 수군 중에서 333명이 함께 대웅전 공포 위아래 인물도를 그렸다고 하는데 아직 온전한 모습이 그대로 전해져서 다행입니다.

아래쪽에 여순사건 희생영령 봉안영가가 보입니다.

흥국사 무사전(無私殿)은 다른 이름으로 명부전 혹은 지장전입니다.명부(冥府; 사람이 죽은 뒤에 심판을 받는 곳)는 사람의 업에 의하여 공평무사(公平無私)하게 심판받는 곳이라 하여 무사전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으로 보입니다.입구 금강역사의 표정이 굉장히 생동감이 있습니다.

 

팔상전 입구 우측엔 금계국이 피어있고 키 작은 문이 저절로 몸을 낮추게 합니다.

원통전의 밖의 모습을 보면 툇마루를 사방으로 둘러 이채로운데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을 모셨습니다.

위치가 안쪽 깊숙히 따로 떨어져 있고, 사방의 툇마루를 걸어서 돌면 탑돌이 형식이 되기 때문에 건축양식이 특이합니다.

다시 대웅전으로 돌아왔습니다.대웅전의 문고리를 잡고 소원을 빌면 한가지는 들어준다는 전설이 있습니다.문고리 아래쪽이 반질반질합니다.

 

여수 흥국사 대웅전은 고려시대인 1195년(명종 25)에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이 창건하였다고 합니다.대웅전 편액 글씨는 송봉(률聿 인것 같은데 정확하지 않습니다)이라는 분이 80세때 쓴 글씨인 모양인데 아주 힘이 넘칩니다.과히 의승들이 몸담은 사찰답습니다.

 

여수 흥국사 홍교는 보물 제563호입니다.현재 남아있는 무지개 다리 중에서는 가장 규모가 큽니다.의승수군들이 전쟁터로 향하면서 홍교를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그것은 전쟁이 끝나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도 되고 "내가 죽어서 돌아오지 살아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이런 각오를 가지고 홍교에서 맹세를 하고 가는 길이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여수선소유적지

선소는 요즘말로 조선소인데 항구의 역할도 겸했습니다.거북선을 만든 곳이고 거북선을 수리,건조,피항한 곳입니다.거북선은 이곳과 중앙동 본영 선소 그리고 돌산읍 "방답진 선소" 이렇게 세곳에서 건조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항만시설인 굴강이 있는데 입구는 좁고 안으로 들어오면 넓어지는 곡선의 아름다움이 느껴집니다만 파도의 영향을 적게 하기 위한 시설로 보입니다.업무를 보던 세검정과 군기고 그리고 대장간이 있습니다만 복원된 모습입니다.

거북선은 나대용이 만들었다고 전해지는데 거북선의 모습을 보면 용머리와 뒤의 날개등을 보면 흡사 반야용선이나 불교 사찰의 석비 받침돌과 비슷한 느낌을 받습니다. 

 

정찬주 작가의 "이순신의 7년" 소설속에서는 "지금까지 거북선 건조 과정은 이순신 장군과 나대용 군관만 거론 됐는데, 삼혜 스님의 역할도 소설속에 삽입시켰다"고 했으며 삼혜스님을 자운스님으로 추정한다고 합니다.  〈여수여천향토지〉에 삼혜 스님이 이순신 장군의 자문 역할을 했고, 거북선 모양을 제안했다는 내용을 참고한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진남관(鎭南館)

이순신장군은 만약 호남이 없었다면 국가는 없었을 것이다(若無湖南 是無國家 약무호남 시무국가)라는 揮毫(휘호)를 扁額(편액)한 글을 되새기게 하는 진남관에 도착했으나 정비사업으로 안을 들여다 볼 수 없었습니다.

진남(鎭南)은 남쪽을 진압하라는 것이니 이순신장군의 심정은 장검에도 잘 나와있습니다.

 

三尺誓天 山河動色 
一揮掃蕩 血染山河

삼척서천 산하동색

일휘소탕 혈염산하

 

석자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하가 떨고

한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산하를 물들인다.

 

또한 진중음에도 엿보입니다.

 

 

陣中吟진중음/진중에서 읊다.

天步西門遠천보서문원 / 왕의 행차는 서쪽으로 멀어져 가고,

東宮北地危동궁북지위 / 왕자는 북쪽 땅에서 위태롭구나.

孤臣憂國日고신우국일 / 외로운 신하는 나라를 걱정할 때이고,

壯士樹勳時장사수훈시 / 사나이는 공훈을 세워야 할 시기로다.

誓海魚龍動서해어룡동 / 바다에 서약하니 물고기와 용이 감동하고,

盟山草木知맹산초목지 / 산에 맹세하니 초목이 아는구나.

讐夷如盡滅수이여진멸 / 원수를 모두 멸할 수 있다면

雖死不爲辭수사불위사 / 비록 죽음일지라도 사양하지 않으리라.

(필사)

* 孤臣이라고 하면 "외로운 신하"가 맞지만 여기서는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의 이름도 "臣"으로 끝나니 이순신 본인을 뜻(중의적인 뜻)하는 글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진남관 아래에 있는 진남관 임란유물전시관을 둘러 보았습니다.여수석인(麗水石人)이 인상적이었는데 임란당시 적을 속이기 위해 돌로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세운 것이라고 합니다.

모니터에 현재 진남관 정비 중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여수중앙초등학교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19일 제주4.3을 진압하라는 이승만 정부의 명령을 거부한 14연대 군인들에 의해 시작된 사건이지만 사건이 종결된 10월27일까지 군인들뿐만 아니라 민간인의 희생도 뒤따랐던 사건입니다.
 
육군 제14연대 주둔지로 되어 있는 전
남 여수시 신월동 805 번지로 가보았지만 한화 유치원 시설만 보였고 다른 곳에선 "한화여수공장"이라고 되어 있어서 검색을 해보았지만 나오지 않아 포기하고 여수중앙초등학교로 갔습니다. 여수중앙초교는 진남관에서 가까웠습니다.

 

종산국민학교(현 중앙초등학교)는 여순사건이 진압되자 여수경찰서와 가깝다는 이유로 수도경찰과 전남경찰 및 여수경찰서 특수대가 군인들과 함께 종산국민학교에 주둔하였고 10월 28일부터는 소위 부역혐의자 색출이라는 이름으로 여수와 인근 읍면 지역에서 끌려온 혐의자를 팬티만 입힌 채, 10명씩 포승줄로 묶어 12월 중순까지 수용하였습니다.

 

특히 부산의 5연대 1대대장이었던 김종원 대위는 혐의자를 취조하는 과정에서 재판없이 즉결처분을 자행(손가락 총으로 지목되면 실제로 처형)하였는데, 일본도로 목을 치는 광란적인 학살 만행을 자행하여 백두산 호랑이라는 악명을 떨치기도 하였고 만성리의 집단학살, 민드래미 골짜기 학살, 호명과 봉계동 학살 모두가 이 학교에 수용되었던 혐의자를 대상으로 하였으며, 아직까지 그 규모와 내용이 밝혀지지 않은 채 통한의 세월이 70년이 넘게 흘렀습니다.

 

형제묘

처음에 사진으로 형제묘라고 되어 있어서 여순 학살 현장에서 형제 두사람이 안타깝게 죽임을 당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만 명칭에 속은 것이었습니다.만성리 학살지와 함께 널리 알려진 형제묘는 학살 후 시신을 찾을 길이 없던 유족들이 죽어서라도 형제처럼 함께 있으라고 ‘형제묘’라 이름 붙여진 곳입니다.마치 제주의 백조일손지묘(百祖一孫之墓)를 연상케 합니다. 종산초등학교(현 중앙초등학교)에 수용되었던 부역혐의자들 중 125명이 1949년 1월 13일 이곳으로 끌려와 총살되고 불태워졌습니다.형제 2명이 아닌 무려 125명입니다.

 

당시 여수경찰서 사찰계 형사가 학살현장을 직접 지켜보았는데, 5명씩 총살한 후에 장작더미에 눕히고, 다시 5명씩 총살하여 5층으로 쌓은 큰 더미 5개, 125명이라는 이야기를 증언하였습니다.처형은 헌병들이 주도하였으며, 장작더미에 기름을 부어 태웠고 처형된 가족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보초를 세우고 태워진 시신 위로 큰 바위를 굴려서 덮었고 시신은 3일간이나 불에 탔으며, 코를 찌르는 독한 냄새는 한 달이 넘도록 계속되었다 합니다. 학살지는 그 외에도 호명동 고객 학살지와 오동도 학살지를 비롯하여 많은 곳이 알려지고 있습니다. 글만 읽어도 소름이 돋습니다. 

 

형제묘는 바닷가 근처에 있습니다.여수를 보면 부산과 비슷한 모습이 많이 보입니다.철길이 지나고 바다에는 배들이 보이고 멀리 섬이 보이는 모습은 부산의 청사포 모습과 유사합니다.산과 바다 사이 산복도로의 고저가 심해서 시내에선 대부분 50km 이내로 다니고 30km제한지역도 많았습니다.

여순사건은 여수와 순천은 당연히 포함되고 경남 산청,하동,구례 등 남도 곳곳이 학살터였습니다.그래서 여순사건과 관련있는 지리산의 구례군 산동면의 "산동애가" 노래가 있습니다.맞습니다. 바로 산수유가 유명한 그 곳입니다.

('산동애가'의 지은이는 백부전이다. 그녀의 본명은 백순례인데, 노리개처럼 예쁘다고 하여 부모님이 부전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녀는 백씨 집안 5남매 중 막내딸이었다. 큰오빠 백남수는 일제의 징용으로 끌려가 죽고, 둘째 오빠 백남승은 여순사건으로 처형됐으며, 셋째 오빠 백남극(나중에 여순사건 고문휴유증으로 사망함) 또한 끌려가게 될 처지에 놓이자, 두 아들을 잃은 어머니 고선옥(1987년 사망)은 부전에게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한다며 간곡한 부탁을 했다. 그녀는 오빠 대신 죽음을 자청했다. 아리따운 열아홉 살 처녀는 형장으로 끌려가며 이 노래를 불렀다.이러한 부전의 희생으로 셋째 오빠 백남극은 다섯 아들을 두어 백씨 집안의 대를 이을 수 있었다.)
 

 

산동애가

 

잘 있거라, 산동아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열아홉 꽃봉오리 피워보지 못하고
까마귀 우는 골을 멍든 다리 절어절어
달비 머리 풀어 얹고 원한의 넋이 되어
노고단 골짝에서 이름 없이 스러졌네.
 
​살기 좋은 산동마을 인심도 좋아.
열아홉 꽃봉오리 피워보지도 못하고
까마귀 우는 골에 나는 간다.
노고단 화엄사 종소리야
너 만은 너 만은 영원토록 울어다오.
 
​잘 있거라 산동아 산을 안고 나는 간다.
산수유 꽃잎마다 설운 정을 맺어놓고
회오리 찬바람에 부모효성 다 못하고
발길마다 눈물지며 꽃처럼 떨어져서
나 혼자 총소리에 이름 없이 스러졌네.

 



2010년도에 읽었던 이명석의 《그로테스크하고 아라베스크한 문화의 백과사전》에 보면 바다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여름철에 즐겨 마시는 칵테일의 일종.
다량의 염분과 플랑크톤, 각종 해초, 물고기 시체,
먹다 버린 콜라, 삼년 묵은 때, 선탠오일, 슬며시 흘려 놓은 소변,
원자력 발전소의 핵폐기물, 좌초된 유조선의 기름 등
갖가지 재료를 넣고 뜨거운 직사광선을 가하면서
각종 해류에 섞어 마시면 된다.
너무 많이 마시면 호흡 곤란을 일으켜 혼수상태에 빠지는데,
이때는 ‘마우스 투 마우스’라는 특수한 키스를 하면 된다."

 

원자력발전소의 핵폐기물이 들어있다는 사실에 정신이 번쩍듭니다.지난번 일본의 기시다 (きしだふみお, 岸田文雄)수상이 방한 한것은 일본의 핵오염수 방류에 대한 한국의 협조 때문인 것으로 보이는데 그 때문인지 통탄할 노릇이지만 현정부와 여당은 일본앞잡이 노릇을 톡톡히 하는 모양입니다.기시다는 선.악의 개념이 없고 일본 국익을 위하지만,윤은 검사출신답게 이분법만 존재하고 한국의 국익엔 관심이 없습니다.따라서 일본과 협상을 할수록 손해보는 구조가 될 것입니다.

 

어원으로 보면 HOMO는 human이고 human은 습지를 의미하는 humid에서 왔다고 합니다.습진 곳은 바로 바다이고 어머니 양수입니다.바다를 죽이는 것은 바로 인류 뿐 아니라 모든 생명의 근원을 죽이는 일입니다.

방답진성 굴강(전남여수시 돌산읍 군내리 987-15)

여기도 발굴작업이 진행중입니다.물을 빼고 바닥이 드러나 있습니다.

 


"100년 전 역사로 무릎 꿇어야 한다는 생각 받아들이기 어려워"라는 역사인식의 오류를 보이는 윤은 일본이 딱 한번 일시적 해프닝으로 우리나라를 침략한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입니다.일본의 침략은 광개토대왕비에도 나오고 삼국사기에도 나오고 조선에서는 임진왜란도 있었죠.따라서 "경술국치는 일시적 사건이 아니라 광범한 시간면적의 연속태"입니다.일본이 반성을 안한다는 것은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쳐들어 온다는 의미입니다.지진을 비롯하여 자연재해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대륙으로 나오려고 할겁니다.이미 독도라는 뇌관에 불을 붙인 쪽도 일본입니다.우리가 바라는 것은 일본의 진정한 반성입니다.즉, 일본은 도덕을 회복하라는 한국인들의 주문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일본은 거꾸로 위안부도 부정하고 중국의 난징대학살도 부정합니다.일본은 수많은 한반도 "침략"을 대륙으로 가기 위한 "진출"이라고 가르칩니다.침략은 나쁘다는 인식이 있는 단어이지만 진출은 도의적으로 나쁘다는 인식을 뺀 단어입니다.

일본의 강점통치가 없었더라면 그 공백을 매우기 위해 미.소 양국의 분할점령도 없었을것이고 미 군정도 없었을것이고 제주4.3과 여순사건도 없을것이고 빨갱이 색출도 없었을것이고 반공이념도 국시가 될수 없었을것이고 6.25전쟁도 발발하지 않았을것입니다.

박경리의 "일본산고"를 읽고 난 후 단상은 현재도 진행형입니다.

1.우리에게 반일은 생존.
2.일본이 지리적으로 가까이 있는 것은 한반도의 불행.
3.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여순사건 Full ver
https://youtu.be/V-LwNMeJ6Og?si=4LDjzM1YWE6Qir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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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어진 산처럼,방랑의 은빛 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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